세상 사람들, 그러니까 ‘시장 비서로 일하는 동안 성범죄를 겪었다’며 그를 고소한 피해자 주변과 극소수의 검찰·경찰을 제외하곤 아무도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몰랐어야 하는 바로 그 시간에 박 전 시장이 돌연 죽음을 택했다. 누가 무슨 헛소리를 갖다 대도 이만큼 명명백백하게 가해자 스스로 사건의 인과관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죽음은 여태 본 기억이 없다.
그런데 만약 그가 살아서 다른 길을 모색했다면, 혹은 좀 더 오래 고민하다 뒤늦게 결심을 감행했다면 지금 어떤 국면이 펼쳐지고 있을까. 가령,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상당 기간 예정된 일정을 소화하며 그의 사망 전날 밤 그랬던 것처럼 서울시 핵심 참모들(6층 사람들)과 남들은 모르는 은밀한 대책회의를 연일 이어갔다면, 피해자를 은밀한 방식으로 압박하며 회유의 강도를 높였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아마 우리는 이 정권의 권력자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빨리 불법적으로 정보를 낚아채 자기를 방어할 시간을 벌 수 있었는지 결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대신 온갖 부정부패·불법 의혹에 휩싸여 위기를 맞았던 이 정권 사람들이 통상 해오던 대로 의혹이 세상에 알려지고 나면 어용 방송 한두 군데에 나가 결백을 주장하고, 명백한 증거를 들이대도 아니라고 우기며 억울함을 호소하고, 이를 신호탄으로 그의 지지자들이 피해자를 향해 온갖 ‘양념 질’로 사태의 본질을 흐리는 사이, 박 전 시장은 세금으로 꾸민 그의 호화로운 장례식장에서 취재하는 기자에게조차 ‘묻지 마 애도’를 강요하며 욕설을 퍼붓던 바로 그 오만한 권력자들과 머리를 맞대고 정권 차원에서 이 위기를 모면할 꼼수를 기어이 찾아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박 전 시장은 고소인이 경찰 조사를 마치자마자 그가 그 시점에 알아서는 안 되는 정보를 토대로 유서를 남겼고, 그로 인해 우리는 지금 뜻밖에도 이 정권이 자기 편의 범죄를 다루는 작동 방식을 일부나마 목격하는 중이다. 미리 알려줘서 증거를 은폐하거나 피해자를 협박할 시간을 벌어주는, 그런 방식 말이다. 모든 수사는 기밀 유지가 기본이다. 권력자를 대상으로 한 성범죄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피해자 측 김재련 변호사가 지난 7일 증거 인멸을 막고 신속한 증거와 진술 확보를 위해 성범죄를 담당하는 서울중앙지검 여성아동범죄조사부 유현정 부장검사에게 맨 처음 전화해 다음 날 고소와 관련한 면담 약속을 잡았지만 몇 시간 뒤 석연찮은 이유로 취소됐다. 박 전 시장을 상대로 한 성범죄 고소 의사를 가장 먼저 알고도 주춤한 사이 어디선가 정보는 유출됐다. 공교롭게도 유 부장검사의 상사는 대통령과의 대학 동문이라는 인연 덕분인지 이 정권 들어 승승장구하며 추미애 법무장관 측근으로 분류되는 이성윤 서울지검장이다. 누구 말대로 냄새가 난다. 물론 아직은 모든 게 의혹뿐이다. 구체적으로 누가 누구와 결탁해 가장 마지막에 알아야 할 사람에게 가장 먼저 정보를 유출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가장 먼저 의혹의 중심에 섰던 경찰일 수도, 경찰보다 먼저 알고 있었으면서도 경찰이 의심받고 있을 때 이런 사실을 숨긴 채 오히려 경찰을 수사하겠다고 나선 검찰일 수도, 아니면 관행대로 경찰로부터 보고만 받았을 뿐이라던 청와대가 자기 진영의 차기 유력 대권주자에게 호의를 베푼 것일 수도 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본격 수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증거인멸의 기회가 주어졌다”(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는 점이다. 국가 시스템의 신뢰를 뒤흔드는 중대한 범죄 의혹을 전 국민이 알게 됐는데 당사자들은 모두 침묵 중이다. 박 전 시장 사망 전날 “실수한 일이 있느냐”라고 물은 임순영 서울시 젠더특보는 어디서 그 사실을 들었는지 묵묵부답이고, 가장 먼저 고소 의사를 인지한 유현정 부장검사는 이성윤 서울지검장에게 보고했는지에 대한 질문에 입을 닫았다. 또 다른 유출 의혹 당사자로 지목된 더불어민주당 젠더폭력 TF 위원장인 남인순 의원 역시 평소 성범죄 피해자와 여성 인권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던 것과 달리 입도 뻥긋 안 하고 있다. 침묵한다고 진실을 언제까지나 감출 수는 없다. 오히려 이렇게 모두가 입을 닫아버린 덕분에 세간의 궁금증을 증폭시키며 역설적으로 더 많은 사실을 노출할지도 모른다. 유독 이 정권과 가까운 범죄자들이 어떻게 그렇게 기막힌 타이밍으로 해외 도피를 일삼으며 수사망을 피할 수 있었는지, 그런 은밀한 비밀 말이다. 안혜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