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D Password  
  Forgot Password or ID | Sign Up  
 
     
Welcome to KoreanFest.com
 
   https://www.kafs.or.kr/file/?idx=15231363&bmode=view [262]

윌리엄 해밀턴 쇼릉 기리며…

윌리엄 해밀턴 쇼의 가족 / 출처 : 목원대학교 홈페이지


서울 녹번동 은평평화공원에 군복차림의 동상이 있습니다. 

6·25전쟁 첫 해인 1950년 9월 22일 서울수복작전 때 녹번리 전투에서 29세로 전사한 미국 해군 대위 윌리엄 해밀턴 쇼를 기리는 조형물 입니다. 

동상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라는 성경 구절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는 일제강점기의 한국 선교사 윌리엄 얼 쇼의 외아들로 1922년 6월 5일 평양에서 태어 났습니다. 

그곳에서 고등학교 를 마친 그는 미국 웨슬리언대를 졸업하고 2차 세계대전 중 해군 소위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전 했습니다. 

1947년 한국으로 돌아와 해군사관학교 교관으로 근무하며 한국해안경비대 창설에 기여 했습니다.

제대 후 하버드대 에서 박사 과정을 밟던 중 6·25전쟁이 터지자 젊은 부인과 두 아들을 처가에 맡기고 재입대 했습니다. 

이때 그는 부모와 주변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조국에 전쟁이 났는데 어떻게 마음 편히 공부만 하고 있겠는가. 조국에 평화가 온 다음에 공부를 해도 늦지 않다고 했다고 합니다]

유창한 한국어로 맥아더 장군을 보좌하며 인천상륙 작전에 성공한 뒤 그는 해병대로 보직을 바꿔 서울 탈환에 나섰다가 인민군 매복조의 습격을 받아 전사 했습니다.

그의 숭고한 사랑에 감명 받은 미국 감리교인들은 아버지 윌리엄 얼 쇼가 공동창립한 대전감리교신학교
(현 목원대)에 '윌리엄 해밀턴 쇼 기념교회’를 건립했습니다. 

그의 부인은 남편 잃은 슬픔 속에서도 하버드대 박사 과정을 마치고 서울로 와 이화여대 교수와 세브란스 병원 자원봉사자로 평생을 바쳤습니다. 

아들과 며느리도 하버드대에서 한국사로 박사학위 를 받고 내한해 장학사업과 한·미 학술교류에 힘썼습니다.

은평평화공원 그의 동상 옆에는 기념비 도 있습니다. 

연세대 총장을 지낸 백낙준 전 문교부 장관 등 60여 명이 ‘키가 크고 평양 말씨를 쓰던 벽안의 친구’를 위해 1956년 녹번 삼거리에 세웠다가 이곳으로 옮겨온 비석입니다. 

비석 받침대에는 제자이자 친구인 해군사관학교 2기생들의 헌사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와 한국 친구들의 특별했던 우정은 국가 간 우방과 동맹의 의미를 일깨워줍니다. 

한국을 위해 목숨보다 더 큰 사랑을 바친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매년 9월 22일 이곳을 찾는다고 합니다. 

그의 동상 앞에 오래 고개를 숙이고 눈물 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눈물이 납니다.
자기가 태어난 나라 코리아를 자기 조국 이라고 생각하며
6.25전쟁이 발발 하자 하버드 대학 에서 박사과정을 밟던 중 
"내 조국에 전쟁이 났는데 어떻게 마음 편히 공부하고 있겠는가. 

조국에 평화가 온 다음에 공부를 해도 늦지 않다''고 하며 부인과 아들을 처가에 맡기고 자원 입대해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의 애국충정을 높이 기리며.....!

There is a statue in military uniform at Eunpyeong Peace Park in Nokbeon-dong, Seoul. 

This is a sculpture commemorating U.S. Navy Captain William Hamilton Shaw, who was killed at the age of 29 during the Battle of Nokburn-ri during the Seoul Retrieval Operation on September 22, 1950, the first year of the Korean War. 

The Bible verse is engraved on the statue: “Greater love has no one than this, that a man lay down his life for his friends.”

He was born in Pyongyang on June 5, 1922, the only son of William Earl Shaw, a Korean missionary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After finishing high school there, he graduated from Wesleyan University and participated in the Normandy landings as a naval ensign during World War II. 

He returned to Korea in 1947 and served as an instructor at the Naval Academy, contributing to the creation of the Korean Coast Guard.

After being discharged from the military, he was pursuing a doctorate at Harvard University when the Korean War broke out, and he re-enlisted, leaving his young wife and two sons in the care of his in-laws. 

At this time, he said this to his parents and friends. 
[How can I study in peace when there is a war in my country? It is said that it is not too late to study after peace comes to the country.]

After assisting General MacArthur with his fluent Korean and succeeding in the Incheon landing operation, he was transferred to the Marine Corps and set out to recapture Seoul, but was killed in an ambush by a People's Army ambush group.

American Methodists who were impressed by his noble love attended Daejeon Methodist Theological Seminary, which was co-founded by his father, William Earl Shaw.
The ‘William Hamilton Shaw Memorial Church’ was built at (currently Mokwon University). 

Despite the grief of losing her husband, his wife completed her doctorate at Harvard University and returned to Seoul, where she devoted her life as a professor at Ewha Womans University and as a volunteer at Severance Hospital. 

His son and daughter-in-law also received doctoral degrees in Korean history from Harvard University and worked on scholarship projects and academic exchanges between Korea and the United States during their visit to Korea.

There is also a monument next to his statue at Eunpyeong Peace Park. 

This is a monument erected at the Nokbeon intersection in 1956 by about 60 people, including former Minister of Education Baek Nak-jun, who served as president of Yonsei University, and moved here for a ‘friend of the wall who was tall and spoke a Pyongyang accent.’ 

The monument's pedestal is engraved with tributes from students and friends of the second class of the Naval Academy.

The special friendship between him and his Korean friends reminds us of the meaning of friendship and alliance between countries. 

It is said that people who remember him, who sacrificed love greater than his life for Korea, visit this place every year on September 22nd. 

There are people who bow their heads for a long time and shed tears in front of his statue.

I'm crying.
He considers Korea, the country he was born in, to be his homeland.
When the Korean War broke out, he was working on his doctorate at Harvard University. 
“How can I study in peace when there is war in my country? 

We pay tribute to the patriotic loyalty of Captain William Hamilton Shaw, who said, "It is not too late to study after peace comes to our country," and left his wife and son with his in-laws, volunteered to join the army, participated in the Korean War, and died.....!

 
 

  지금...이 순간...  
   뉴욕의 covid-19 상황
안녕하세요. 페이스북 원래 잘 하지도 않고 더구나 이렇게 글을 쓰는건 몇년만 인거 같은데, 지금 뉴욕의 covid-19 상황이 상황인지라, 많은 분들이 순전히 이 심각한 상황을 모르고 계시는거 같아 알려드리고자 이렇게 글을 적어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조금이나마 이 전쟁터 같은 현실에 도움이 되길 바래보고요. 저는 맨하탄 병원중 수술과 중…
   오늘...이탈리아의 의사의 간증...
방금 전해온 현재 고군분투 중이신 한 이탈리아의사의 간증입니다. 주위에 많이 나누어 주시기를 권합니다. 세상을 흔드심을 통하여 당신의 사랑하시는 백성들이 주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고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우신 섭리와 크신 은혜에 감사와 영광과 찬송을 올립니다 ! 아멘 할렐루야 [ 나는 이제 하나님의 …
   Over 73,000 Accepted Jesus As Lord And Savior In P..
.
   우리들의 영웅!! 대구로 달려간 간호..
나는 배웠다 나는 배웠다. 모든 시간은 정지되었다. 일상이 사라졌다.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 만나도 경계부터 해야 한다. 여러 사람이 마주 앉아 팥빙수를 겁 없이 떠먹던 날이 그립다. 가슴을 끌어안고 우정을 나누던 날이 또다시 올 수 있을까? 한숨이 깊어진다. 비로소 나는 일상이 기적이라는 것을 배웠다. 기적…
   They are real heroes. (Italian doctors)
They are real heroes. (Italian doctors) https://www.instagram.com/artdaily_official/
   시카고지역 의료품 품절현상에 기증..
시카고지역 의료품 품절현상에 기증자들 호응 늘어 03/29/2020 9:00 News Chicago Bulls(농구), Chicago Blackhawk(학키) 팀들의 전당인 United Center 의 Parking 장이 이번 Pandemic 으로 공터처럼 되어버렸었는데 시카고 지역의 병원에 의료품 품절 현상을 돕기 위하여 민간인들로 부터 의료용품 기증 수령처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가정에서 쓰려고 저당했던…
   향기로운 감동 메시지
인간은 감동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한다 감동을 느낄 때 사람들은 새롭게 눈이 뜨이고, 꽉 닫혔던 마음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여진다한다.. ‘감동은 한 순간에 고정된 생각과 습관을 변화시킵니다..’ 19세기, 옥스퍼드 대학 종교학 시험에서 학생들은 "물을 포도주로 바꾼 예수의 기적에 대해 논하라"는 문제를 받고…
   자식들의 입장과 불쌍한 엄마

엄마가 57세에 혼자가 되어버렸다. 나의 이혼소식에 쓰러진 아버진 끝내 돌아오지 못하셨고 그렇게... 현명하셨던 엄마는 정신이 반 나간 아줌마가 되어 큰오빠 작은오빠 눈치보기 바빴다. 이제 아버지 노릇을 하겠다는 큰오빠 말에 그 큰집을 팔아 큰오빠에게 다 맡겼는데... 부모님을 나 몰라라 하는 큰오빠, 큰오빠는 작은 오빠의 모든 원망을 다 감수해야 했다. 사이 좋았던 팔남매가 큰오빠 때문에 모이는 횟수가 줄어들수록 엄마…

   가정의 달 5월을 맞이하며~

가정의 달 5월을 맞이하며~ 가정이란? 부부(夫婦)를 중심으로 그 부모(父母) 나 자녀(子女)를 포함(包含)한 집단(集團)과 그들이 살아가는 물리적(物理的) 공간(空間)인 집을 포함(包含)한 생활공동체(生活 公同體)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사람은 가족(家族)과 같이 살면서 가족의 소중함을 모른다. 가정은 최고(最高)의 안식처(安息處)이다. 사랑과 이해(理解)로 서로를 감싸준다. 대가없는 희생(犧牲)과 베품이 가득한 곳이다. *1852년 4월10…

   “내 우물쭈물하다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

남은 인생, 어떻게 살 것인가? ​ 백 년 전쟁 때 영국의 태자였던 에드워드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지나가는 이여, 나를 기억하라. 지금 그대가 살아 있듯이 한 때는 나 또한 살아 있었노라. 내가 지금 잠 들어 있듯이 그대 또한 반드시 잠들리라. 어느 성직자의 묘지 입구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는데... “오늘은 내 차례, 내일은 네 차례” 라고 적어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유럽과 아시아 인도, 그리고 에집트까…

   죽더라도 체통은 지키자
1912년 타이타닉호가 빙산에 부닥쳐 침몰하는 과정은 영화로 재연됐습니다. 영화만으로 실제 상황을 다 알기는 어렵습니다 당시 생존자인 부선장은 오랜 세월 침묵 끝에 드디어 사고 당시의 이야기를 공개했습니다. 1912년 4월 14일은 공포의 날이었습니다. 사고로 1,514명이 사망했고 710명이 구조되었습니다. 사고 당시 38세였던 타이…
   아버지…
[사진의 기억] 어느 아버지의 초상 1932년부터 2015년까지 대한민국을 살다 간 한 남자가 있다. 이름 김순철. 고향이 평안북도 구성인 그는 열다섯 살에 홀로 삼팔선을 넘었고, 6·25전쟁에 참전했다. 생계를 위해 안 해 본 일 없는 청장년기를 보냈고 마흔이 되어서야 결혼해 1남2녀를 두었다. 몇 번인가 사업 실패로 고전했지만 가족에게는 내색치 않…
   업어주는 사람
&lt;업어주는 사람&gt; -나민애 문학평론가- 오래전에 냇물을 업어 건네주는 직업이 있었다고 한다 / 물가를 서성이다 냇물 앞에서 난감해하는 이에게 넓은 등을 내주는 / 그런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중략) 병든 사람을 집에까지 업어다주고 그날 받은 삯을 / 모두 내려놓고 온 적도 있다고 한다 / 세상 끝까지 업어다주고 싶은 사람…
   살며 사랑하며/ 80억 지구에서 살아간다는 것

&lt;살며 사랑하며/ 80억 지구에서 살아간다는 것&gt; -김선오 시인- DNA에 입력된 인간의 자연 수명은 38세라고 한다. 1992년에 태어나 올해 만 30세인 나는 곧 노년기에 들어서는 셈이 다. 위생과 의학의 발전은 인간의 평균 수명을 자연 수명의 2배 이상 끌어 올렸다. 현재 한국의 평균 기대수명은 83.5세다. 나날이 빨라지는 정보의 확산과 기술의 발달을 통해 인류의 평균 수명은 점점 늘어갈 것이다. 수명이 늘어간다는 건 한 개체에 …

   십자가 없는 십자가상
십자가 없는 십자가상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석좌교수- 소재만으로도 충분히 슬픈데 내막을 알면 더 슬퍼지는 예술품이 있다. 조각가 권진 규의 건칠(乾漆) 작품 ‘십자 가 위 그리스도’가 그러하다. 서른세 살의 나이에 십자가 형을 받고 세상을 떠난 예수 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그런데 조각가는 삼베에 건칠 작업을 해 예수…
처음  1  2  3  4  5  6  맨끝





Donation

678-978-2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