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기억] 어느 아버지의 초상
1932년부터 2015년까지 대한민국을 살다 간 한 남자가 있다. 이름 김순철.
고향이 평안북도 구성인 그는 열다섯 살에 홀로 삼팔선을 넘었고, 6·25전쟁에 참전했다. 생계를 위해 안 해 본 일 없는 청장년기를 보냈고 마흔이 되어서야 결혼해 1남2녀를 두었다. 몇 번인가 사업 실패로 고전했지만 가족에게는 내색치 않았다. 그는 돌도 안 된 아들에게 세발자전거를 선물했고, 대학 가는 딸들에게는 데모하지 말라 당부했다. ‘이제 좀 살만해졌을 때’ 노환과 함께 알츠하이머가 찾아왔다. 생애 마지막 날, 그의 한마디는 ‘아버지가 부족해서 미안하다…’였다.
사진가 김희진은 그런 김순철씨의 여식이다. 사진 시리즈 ‘金順喆(김순철)’은 딸이 그 아버지의 생애를 찍고 기록한 것이다. 김희진은, 홀로 삼팔선을 넘는 어린 아버지의 등 뒤에서 사진을 찍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함께 있었다. 문 닫은 회사를 뒤로하고 귀가하는 아버지의 걸음도, 기억이 지워져 가는 늙은 아버지의 시선도 찍었다.
그 기록들이 ‘金順喆’이라는 제목의 전시와 사진집으로 묶였지만, 사진 어디에도 김순철은 없다. 차도와 인도의 경계에 주저앉은 취객의 뒷모습, 버려진 시계, 신문지가 덮인 배달 쟁반, 날아가는 연…모두 보아도, 김순철씨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알 수 없다.
그런데도 김순철은 ‘있다’. 00540080, 3211151334919, 0185407 등 사진 옆에 적힌 숫자들이 엄연히 존재했던 김순철씨의 환자번호, 주민등록번호, 군번, 납골당번호이듯이, 각각의 사진들은 모두 김순철씨의 고단했던 삶의 단편들과 감정들을 은유하고 묘사하고 상징함으로써 그를 호명한다. 사진가 딸은 이미 지나간 시간과 사라진 존재를 현존하는 상황과 사물로 치환하는 방식을 통해 아버지를 기억하고 기록한 것이다.
더 나아가 ‘金順喆’은 김순철 한 사람만이 아니라 그로 대변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로도 확장된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전쟁의 상처와 유신, 민주화 항쟁 등…. 대한민국 현대사를 고스란히 관통했지만 자신의 삶을 스스로 조정하기엔 역부족인 시대를 살았던 수많은 김순철들의 초상인 것이다. 사진의 경계를 허물고 확장한 사진가 김희진에 대한 놀라움이 여기에 있다.
박미경 류가헌 관장